의문을 말하는 음악, ‘암살자(들)’의 세헤라자데
- 문화 이벤트 / 문광주 기자 / 2026-09-29 19:09:36
- 1974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 모티브, 단수 아닌 복수형이 던지는 정치·역사적 의문
- 러시아 국민주의 작곡가 림스키코르사코프와 천일야화의 기묘한 만남
- 방랑하는 탁발승의 목소리, 바순 선율이 자아내는 묘한 연상
- 다양한 질문과 답을 허용하는 문화적 자유, 그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증거
의문을 말하는 음악, ‘암살자(들)’의 세헤라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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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사실과 허구적 상상력 사이, 논란의 중심에 선 ‘암살자(들)’
2026년 9월 23일 개봉한 허진호 감독의 ‘암살자(들)’은 1974년 광복절 기념식에서 발생한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을 모티브로 한 정치 스릴러다. 실제 역사적 사건을 허구적으로 재구성한 이 영화는 사건의 배후에 또 다른 주체가 있었을 가능성을 추적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이나 당시 권력기관의 개입 가능성을 암시하는 듯한 설정을 두고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이 제기됐고,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과 일부 정치권에서는 상영 중단과 법적 대응까지 요구하고 있다.
반면 제작진은 다양한 기록과 자료를 바탕으로 영화적 상상력을 더한 극영화일 뿐 특정 인물을 사건의 배후로 규정하거나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제작한 작품은 아니라고 밝혔다.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삼은 영화가 어디까지 역사적 사실을 재현해야 하는가, 어디까지 허구적 상상력을 허용할 수 있는가는 쉽게 결론 내리기 어려운 문제다.
더구나 ‘암살자(들)’은 제목부터 ‘암살자’가 아니라 ‘암살자(들)’이라는 복수형을 사용함으로써 문세광이라는 한 명의 범인 외에 또 다른 주체가 있었을 가능성을 질문의 형태로 남겨놓는다. 영화는 그 질문에 명확한 결론을 제시하기보다 관객에게 의문을 건네는 방식을 택한다. 이 때문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논쟁 역시 더욱 거세진 것으로 보인다.
묵직한 정치 스릴러 속 미소를 부른 뜻밖의 유희: ‘세헤라자데’의 등장
그러나 필자의 귀를 사로잡은 것은 정치적 논쟁보다 의외의 순간에 흘러나온 음악이었다. 시종일관 진지하고 무거운 분위기로 진행되는 영화에서 필자로 하여금 빙긋이 웃음을 흘리게 한 대목은 러시아 작곡가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세헤라자데’가 나직히 깔리는 순간이었다.
19세기 후반 러시아 국민주의 음악의 확립에 크게 기여한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상당히 독특한 이력을 가진 작곡가다. 그는 작곡가가 되기 전 해군사관학교에서 교육받았고, 18세에 졸업한 뒤 해군 장교로 세계 일주 항해에 나섰다. 훗날 그의 음악에서 두드러지는 바다와 이국적 풍경에 대한 감각을 생각하면 흥미로운 경력이다.
‘세헤라자데’는 아랍어권 설화집인 ‘천일야화’, 즉 ‘아라비안 나이트’에서 영감을 얻어 1888년에 작곡된 교향모음곡이다. 술탄 샤리아르에게 목숨을 위협받던 세헤라자데가 매일 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신의 처형을 하루씩 미루게 만들고, 결국 술탄의 마음까지 돌려놓는다는 액자식 이야기가 작품의 배경을 이룬다. 정확히 말하면 세헤라자데가 이야기를 들려준 기간은 ‘1천1일’이 아니라 ‘1천일하고도 하룻밤’, 즉 1001개의 밤이다.
방랑하는 탁발승의 목소리, 바순 선율이 자아내는 묘한 연상
림스키코르사코프는 이 가운데 ‘바다와 신밧드의 배’, ‘칼렌더 왕자의 이야기’, ‘젊은 왕자와 공주’, ‘바그다드의 축제―바다―청동기사가 있는 바위에서의 난파’라는 네 장면을 음악으로 그려냈다. 그중 ‘암살자(들)’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것은 제2악장 ‘칼렌더 왕자의 이야기(The Tale of the Kalendar Prince)’에 등장하는 선율이다.
특히 바순의 독주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음색은 이 음악을 한 번 들으면 쉽게 잊기 어렵게 만든다. 여기서 ‘칼렌더(Kalendar, Kalandar)’라는 이름도 흥미롭다. 이는 단순히 서양식 의미의 ‘왕자’를 뜻하는 말이라기보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방랑하는 수행자나 탁발승을 연상시키는 명칭이다.
그래서 제2악장의 바순 선율은 흔히 생각하는 영웅적이고 위엄 있는 왕자의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필자가 이 악장에서 가장 흥미롭게 듣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바순은 영웅의 목소리라기보다 어딘가 우스꽝스럽고 쓸쓸하며, 먼 길을 떠돌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그 뒤를 이어 다른 목관악기들이 그 선율을 받아가면서 음악은 조금씩 다른 표정과 긴장감을 만들어낸다.
실제로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이 바순 선율을 특정 인물의 성격이나 줄거리를 직접 묘사하기 위해 작곡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작곡가 자신은 이 독주를 이야기의 분위기와 모험을 제시하는 음악적 장치로 보았다. 그럼에도 ‘암살자(들)’ 영화 안에서 이 음악을 듣고 있으면 묘한 연상이 생긴다.
영화와 음악의 우연한 결합이 빚어낸 제3의 의미와 해석의 자유
누군가는 묻고, 누군가는 이야기한다. 누군가는 진실을 파헤치려 하고, 누군가는 그 진실을 감추려 한다. 바순이 낮고 인간적인 목소리로 무언가를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이어지는 목관의 선율이 그 이야기에 다른 결을 부여하면서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과 묻혀버린 수수께끼가 다시 떠오르는 듯하다.
바로 이 때문에 필자는 영화 속 ‘세헤라자데’의 삽입이 재미있었다. 영화가 다루는 사건의 역사적 진실과 음악 자체의 작곡 의도는 별개의 문제지만,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두 가지가 만나면서 제3의 의미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이 음악감독 조영욱(Cho Young-wuk)이 의도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조영욱은 ‘올드보이’, ‘아가씨’, ‘헤어질 결심’ 등 박찬욱 감독의 여러 작품에서 음악을 맡았고, 허진호 감독의 전작 ‘남산의 부장들’에도 참여한 음악감독이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칼렌더 왕자의 이야기’를 영화 속 인물들과 연결해 이러한 효과를 의도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여기까지는 전적으로 영화를 본 한 평론가의 해석이다.
그런데 어쩌면 영화의 묘미는 바로 이런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한 편의 영화가 하나의 해석만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과 영화적 허구 사이에서 끊임없이 질문을 만들어내고, 그 질문이 다시 음악과 만나 또 다른 해석을 낳는다. 누군가는 그 허구성을 비판할 수 있고, 누군가는 표현의 자유라는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으며, 또 누군가는 필자처럼 영화 속 한순간에 삽입된 음악 한 곡을 붙잡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시작할 수도 있다.
결국 ‘암살자(들)’을 둘러싼 논쟁 역시 영화가 던진 질문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의 문제일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서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사실 자체만큼은 민주주의 사회가 우리에게 허용하고 있는 중요한 자유 가운데 하나다.
영화 한 편을 보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 심지어 그 영화가 던진 질문에 서로 다른 답을 내릴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우리가 민주주의의 혜택을 가장 일상적으로 누리고 있다는 증거도 바로 그런 데 있는 것은 아닐까.
글: 성용원(작곡가)
[더사이언스플러스=문광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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